대한민국 경쟁과 기회 사이에서 길을 잃다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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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람들, 과거에 비해 확실히 경제적으로는 풍부해졌습니다. 77년 국민소득 1000달러를 자축하던 우리는 이제 국민소득 2만 불 시대를 달려가고 있습니다. 불과 30년 사이에 20배가 넘는 초고속성장을 달성한 것입니다. 세계역사상 유례없는 대단한 성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을 사는 한국인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습니다. 길을 가는 누구를 잡고 물어 보아도 “행복한가요?”라는 질문에 흔쾌히 예스라고 대답 못하는 분위기입니다. 성장은 가속화 되었지만 그 성장을 행복으로 바꾸지 못한 답답함이 사람들의 표정에서 묻어납니다.

고학력 청년실업이 100만 명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어렵사리 얻은 직장 생활도 하루하루가 불안합니다. 그렇다고 직장을 뛰쳐나오면 뾰족한 수가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허약한 사회안전망으로 노후대책은 고사하고 당장 생계도 허덕이는 현실이 무섭습니다. 교육비, 양육비 걱정에 여성들은 출산 파업을 벌이고 있으며 초고령 사회로의 급행열차는 그 속도를 멈출 줄 모릅니다.

반면 사회 분위기는 온통 경쟁 앞으로는 외치고 있는데 그 느낌이 진짜 살벌합니다. 물론 경쟁이 두려운 건 아닙니다. 그러나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좀처럼 들지 않습니다. 타고난 배경과 재산 그리고 각종 끈과 빽이 공정한 경쟁을 방해하고 있다고 다들 생각합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최근 한 조사기관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한국에서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는 응답은 4명 중 1명이라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다 경제활동의 중심인 30~40대 가운데 약 35%는 ‘지난 1년간 이민을 심각하게 고려했다’고 합니다.



히말라야 산기슭에 자리 잡은 인구 100만 명, 1인당 국민소득 1,400달러의 나라 부탄은 전 세계 국가들이 국내총생산(GDP) 기준의 성장 경쟁에 혈안이 돼 있을 때 GDP 대신 국민 총행복(GNH)을 주창했습니다. 이는 부자로 사는 것이 곧 ‘행복 선진국’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메시지입니다.

국민들의 소득은 낮고 경쟁력은 떨어지지만 공동체를 소중히 하는 자급자족의 나라 부탄은 영국 신경제 재단(NEF)과 레스터대학이 각각 실시한 각국 행복도 조사에서 세계 178개국 가운데 1위와 8위를 차지해 성장에만 몰두하던 세계 각국에 ‘행복’의 의미를 돌아보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가난하게 사는 게 꼭 행복하다고 볼 수 는 없습니다. 소득수준이 낮아도 행복지수가 떨어지는 국가가 있고(주로 동유럽 국가들) 소득이 높으면서 또한 국민들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국가도 있습니다. (북유럽 국가들)

사실 국가행복지수는 주관적인 지표이므로 일괄적으로 수치화 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봅니다. 그러나 중요한건 국민의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일수록 깨끗한 환경이 보존되어 있으며 자급자족율이 높고 사회적 양극화와 이념적 편가름이 적다는 것입니다.

지금 보면 한국인에 대한 평가는 ‘행복’보다는 ‘불행’에 가까운 것으로 나타납니다. NEF의 행복지수에서 한국 순위는 102위. 역시 영국 레스터대학의 행복도 조사에서도178국 가운데 102위. 미국 미시간대학의 ‘세계 가치관 조사’에서 나타난 행복도 지수는 39개국 가운데 28위입니다. 이 조사에서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보다도 오히려 낮아졌습니다.

왜 행복을 못 느끼는 것인가?

첫째, 지나친 경쟁사회가 그 원인입니다. 그것도 특히 경쟁의 가장 하단 부분이 제일 가혹 하다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 합니다.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갈 때마다 되레 경쟁이 허술해지고 기득권이 유지되는 희한한 구조 때문에 하단에서는 무모하리 만큼 지나치고 말도 안 되는 경쟁이 벌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과정에서 좌절하고 분노하고 절망합니다.

둘째, 사회 전체에 팽배한 상대적 박탈감, 즉 피해의식입니다.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다는 상대적 박탈감은 해가 거듭될수록 높아만 갑니다. 특히 앞서 지적한 대로 우리사회의 경쟁구도라는 게 지극히 비정상적이기 때문에 승복문화가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 이유도 있습니다.

사실 경쟁과 기회는 동전의 앞뒤와 같습니다. 경쟁이 없는 곳에 기회가 생길 리가 없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곳이 제대로 된 경쟁이 발생할리도 없다는 것입니다. 경쟁은 기회를 생산하고 기회는 경쟁을 촉진합니다. 이는 자전거가 두 바퀴의 조합으로 앞으로 굴러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치가 이렇게 뻔함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사회에는 이른바 한쪽만 죽어라 들여다보는 외눈박이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제대로 된 기회, 공정한 기회 없이 죽어라 경쟁 지상주의만 외치는 자들이 있고 반대로 경쟁을 회피하는 독선적인 기회만 노리는 자들도 있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자전거의 한쪽바퀴를 잠가놓고 한쪽 바퀴만 굴려서 앞으로 가자는 발상과 다르지 않습니다. 다시말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자전거 바퀴를 돌리면 자전거는 결국 옆으로 쓰러집니다.

다시말 하지만 생각이 이렇게 뻔한데도 이런 뻔한 생각이 사회적으로 유지되고 관철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사회 내부에 뭔가 비합리적인 판단시스템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한국인들이 당면하고 있는 풀어야할 숙제입니다.

한국인들은 개개인별로는 너무도 훌륭합니다. 티비에 나와서 멱살을 잡고 흔드는 정치인들도 개별적으로 만나보면 그보다 더 훌륭한 신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개인적으로 저렇게 뛰어난 사람들이 집단화만 되면 어이없는 모순덩어리로 변질되는 것인가요?

왜 항상 불합리한 판단에 목을 매고, 양극단에서 거친 자기주장만 하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양보에는 인색할까요?도대체 왜 그럴까요. 이는 한국인들이 역사적 경험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적 지배를 받아왔기 때문입니다. 전통적 농경사회와 중앙집권 시스템이 결합하면 이는 일종의 수탈의 경제시스템이 됩니다. 일단 모든 자원을 중앙이 거두어가 다시 재분배해줍니다.

여기에 적응하기 위해서 하부는 중앙의 요구에 생산량을 조작합니다. 100원을 벌었으면 50원만 소득으로 신고합니다. 그래야 덜 착취당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이 오랜 기간 동안 몸에 배어 한국인의 유전자에 각인되어 전해 내려왔습니다. 한국인의 피해의식은 대단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합리주의를 표방하는 사람은 (집단 내에서) 가장 먼저 손해 본다는 심리가 강합니다. 경쟁이 불합리하다고 해서 경쟁을 거부하지 못합니다.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혼자만 보복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합니다.

기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기회를 일종의 수탈의 수단으로 인식합니다. 그러다보니 기회만 생기면 기회를 독점하고 장벽을 만들려는 심리가 강합니다. 기회는 능력을 통해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기회 자체가 능력이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이 모든 게 다 역사적인 경험에서 기인합니다.

그러나 가장 소중한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미래사회가 한국인에게 원하는 건 집단속의 나약한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강한 개인입니다. 수탈의 역사는 봉건사회의 잔재일 뿐입니다. 설사 현시점까지 우리사회에 전근대적 잔재가 남아있다고 하더라도 이는 극복해야할 대상이지 규정하고 따라야할 기준은 아닌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왜 “개인의 의사표현의 자유”를 가장 소중한 권리로 설명할까요? 그것은 바로 개인이 민주주의의 의사결정의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사회를 희망찬 미래로 끌고가는 힘은 개인의 의사표현의 합리성에서 나옵니다. 그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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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5/06 02:37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09/05/06 02:38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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