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6월10일 칼럼

오랜만에 개인적인 소회를 담은 포스팅을 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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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6월 10일 

지금으로 부터 24년전이다. 벌써 이렇게 되었나? 기억이 아직도 이렇게 또렸한데 24년의 세월이 흘렀다는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난 그때 대학 신입생이었다. 87학번, 선배들은 그런 학번이 있냐고 놀리던 그런 풋풋한 시절이 있었다. 내가 다니던 대학은 당시 고등학교로 놀리던 학교였기 때문에 3,4월은 학습량에 적응하느라 정말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휙지나갔던거 같다. 

5월 학교에서 첫 최루탄 냄새를 맡게 된다. 정문 투쟁이라는 것을 처음 본것도 그때였다. 시위대가 학생회관에서 동을 떠서 학교를 한바퀴 돌면서 사람을 모으면 그 기세로 정문을 돌파하는게 이른바 정문투쟁이다. 정문에 다다르면 이미 전투경찰이 진을 치고 있다. 학내시위대가 정문, 30m쯤에 도달하면 최루탄을 쏘고 전경들이 학교내로 진입한다. 그리고 시위학생들을 잡아간다.

내가 처음 본 학교내 시위장면은 대강 이랬다. 최루탄이 터지면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다들 도망가기 바빴다 간혹 돌맹이를 던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는 거리를 두고 구호를 외치는 정도로 시위를 끝냈다. 그게 87년 6월 이전의 학교 풍경이었다. 난좀 이해가 안가는게 정문 돌파가 목표라면 차라리 잠복해 있다가 단번에 정문을 치고 나가지 왜 스크럼을 짜고 학교를 빙빙돌까였다. 

학교를 빙빙 동안 학교 길 건너편에 차를 대고 대기하던 전경은 그 시간동안 대오를 갖추고 최루탄을 장전하는거잖냐. 내가 이렇게 선배들에게 묻자, 선배들은 내 머리를 쥐어박고 "야 임마 우리가 사회운동하는 거지 테러하는거냐"라고 한마디 했다. 그제서야 나는 그 정문돌파라는게 일종의 상징이지 목표는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87년에는 정말 굵직한 일들이 많았다. 1월에 서울대 박종철학형이 고문치사로 사망했다. 그러나 당시는 전두환 철권통치 시절이다. 학교는 잠잠했다. 3월이 되고 개강을 해도 학생들의 움직임은 소극적이었다. 4월 13일 전두환의 호헌조치가 내려졌다. 국민들은 또한번 공포를 느꼈다. 여기서 대들면 저놈들이 또한번 광주학살을 일으킬 것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전두환 정권의 폭압은 대단했다. 정말 끽소리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얼음 사이로 물이 녹듯이 4.13 호헌조치 이후 분위기가 뜨거워졌다. 그리고 6월9일 드디어 6.10 항쟁 출정식이 열렸다. 그러나 이때만해도 캠퍼스의 학생들은 그 여파를 몸으로는 느끼지 못했다. 기말고사 기간이라서 공부하러 도서관에 나오는 친구들 역시 많았다. 

하지만 6월 10일 아침 거짓말 처럼 세상이 확 뒤집어졌다.

6월9일 가두시위에 나갔다가 수많은 학생들이 연행되었고 연세대 이한열 학형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고 이런 비참하고 공분을 일으키는 사건이 터지자 드디어 침묵하던 다수가 분노의 대열에 동참하게 된거다. 내가 대학을 다니면서 그렇게 많은 학생들이 한자리에 모인걸 본적이 없었다.


6월10일 아침 학교광장에 2천5백명이 모였다. 전체학생수가 5,6천되는 상황에서 이건  기적이나 다름이 아니다. 그 사람들이 그날 모두 시험거부를 선언했고 그길로 시위에 나섰다. 우리 학교 뿐이 아니다. 전국의 대학이 동시에 이런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1,2천명 하던 집회의 규모가 10만, 20만의 규모로 바뀌게 된다.

6월항쟁에는 크게 세번의 큰 고비가 있었다. 첫째는 앞서말한 6월9일, 10일의 상황이고 둘째는 6월16일 시위였고 세번째가 6월 26일의 시위였다. 집회의 규모는 뒤로 갈 수록 점점 커졌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건 6월 16일 이후 부터 6월 29일 이른바 629선언이 나오기까지 십며칠이다.

6월 16일 전국적인 시위로 전두환정권을 정상적인 방법으론 시위를 막을 수 없다는 결론을내린거 같았다. 이때부터 학교에는 80년 광주처럼 공수부대가 학교로 들어올 것이라는 이야기가 소문으로 돌았다. 곧 휴교령이 떨어지고 위수령이 발동할 것이라는 소문이 근거있는 말처럼 퍼져갔다.

19살 대학 신입생인 내 머리속으로는 그림조차 그려지지 않았다. 집이 시골인 친구들은 집에서 내려오라고 전화가 빗발치고 있었다. 나는 집도 서울이라 어디 갈때도 없었다. 뭘해야 되는 걸까? 혼자서 고민해보지만 나이 어린 내가 내릴 답은 없다. 선배들은 학교가 봉쇄되면 학교근처 신수동 성당에 집결하자고 작전을 짜놨지만 솔직히 거기까지 가기엔 겁이 너무 많이 났다

그렇게 고민이 흘러 가면서 6월26일이 다가왔다. 이젠 수십만의 규모가 아니라 전국적으로 수백만의 인파가 시위대로 나왔다. 거리의 시민들은 모두가 한마음이다. 예전처럼 눈치보고 그런것도 없다. 집회와 시위는 도심에서 자연스럽게 열리고 심야까지 시위대는 명동, 충무로 일대를 장악했다. 

그러나 그 다음날 군이 출동한다는 소식이 겉잡을 수 없게 들려왔다. 솔직히 무서워서 집밖을 나오지 못했다. 학교에도 가보지 못했다. 핸드폰이 있던 시절도 아니기 때문에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도 없었다. 너무 무서워서 스스로 담을 치고 그 공간안에 갇혀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629 선언이 나왔다. 그 선언의 진정성이나 뭐 속셈 이런건 차치하고라도 돌이켜보면 난 전두환과 노태우 그 군바리들이 학살을 포기했다는 사실이 내심 놀라왔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게 만든 6월항쟁의 위대함이 역시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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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보면 지금은 세월이 흘러 최루탄의 냄새조차 잊어버린거 같다. 벌벌 떨면서 전투조 자원한다고 나가던 친구들, 거구장 앞에서 망치들고 콘크리트 돌맹이를 깨주던 여학우는 지금 다들 중년의 넉넉한 모습을 하고 있겠지?  당시 병원앞 공터에서 전경차 대놓고 길바닥에서 밥먹던 전경들은 또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긴 다들 시험거부하고 거리로 나갔는데 혼자 시험친다고 강의실 들어갔던 친구들도 몇 있다. 그 친구들의 고집은 도대체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당시 교수들도 시험거부에 동참하는게 대세라서 이들의 고집은 그리 빛나지는 않았던거 같다.

아련한 기억속에 오늘이 6월 10일이다. 과연 우리는 지난 24년동안 그 치열한 6월의 기억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었을까?. 소주가 생각나는 오늘 6월 10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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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Nine One 2011/06/10 18:00 #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을 기억하는 사회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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